저 멀리서 진주씨가 빠른 걸음으로 오고 있다. 2년 전 여름 끝자락, ‘부산 돌려차기 강간살인미수 사건’ 피해자로 그를 처음 만났던 부산지방법원에서, 이젠 피해자의 곁을 지키는 연대자로 그를 다시 만났다. 2024년 7월3일 ‘부산 오피스텔 추락사’ 피고인 전아무개씨에 대한 1심 선고가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피고인 전씨는 스토킹·폭행 등 교제폭력을 이어갔고, 피해자는 고통받다 죽음으로 몰렸다. 수사기관이 자살로 결론 내린 이 사건과 관련해 전씨는 피해자 사망 당시 현장에 있었으면서 계속 거짓말했다. 그는 사건이 외부로 알려지고 나서야 구속됐으며, 선고 전 ‘기습공탁’을 했다. 자살방조로조차 기소되지 않은(스토킹 처벌법 위반, 특수협박 등으로 기소) 전씨에 대해 법원은 검찰 구형 10년보다 적은 징역 3년6개월을 선고했다.
선고 후 유족은 허망함을 이기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했다. 그 곁에서 이번 결과를 어떻게 수용하고 대처해야 할지 고민하는 건 우선 진주씨에게 맡기고 김해공항으로 달려갔다. 2024년 7월은 친밀한 관계의 파트너(전현 연인·배우자)에 의한 살인사건 재판이 많다. 김포공항에 도착한 뒤 바로 서울고등법원으로 향했다. ‘인천 스토킹 보복살인사건’ 가해자 설아무개씨의 2심 결심공판이 있기 때문이다. 피고인의 칼에 크게 다친 피해자 어머니와 눈앞에서 살해당한 엄마의 모습을 기억하는 어린 딸 대신 매 공판에 참여하며 공소장 변경(살인→보복살인)을 이끌어내고, 사건 관련 자료를 지속적으로 제출하며 자리를 지키던 사촌언니, 사촌오빠와 지인들을 그날도 법정에서 만났다. 떨리는 사촌언니의 손을 잡고 다독거린 뒤 검사의 최종의견과 피고인 쪽 최후변론·진술을 방청석에서 들었다. 검사는 1심에 이어 사형을 구형했고, 피고인은 ‘피해자에게 멸시당하다 저지른 범행’이라며 피해자 탓을 이어갔다. 피해자의 어린 딸을 기어코 또 언급하는 피고인의 행태에 사촌과 지인들이 분노했다.
7월4일은 ‘바리캉 교제폭력사건’의 결심이 있었다. 전 공판에서 피해자와 가족에게 온갖 모멸감을 안겼던 피고인 변호인들은 결심에서도 ‘2차 가해’를 이어갔다.(제1521호 피해자 어머니 진료기록까지 보겠다고? 참조) 피고인 변호인들이 피고인 신문을 통해 피해자를 ‘문란한 여성’으로 묘사하자, 피해자 변호사가 문제제기를 했고, 신문은 비공개로 전환됐다. 신문 뒤 다시 공개된 결심에서 피고인 변호인 쪽 최후변론은 길이 남을 역겨운 장면의 연속이었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출신 변호인은 피고인 김씨의 교제폭력을 ‘사랑에 미친 젊은 남성의 일탈’ 정도로 묘사하며 그를 ‘베르테르’에 빗대어 옹호했다. 합의·공탁을 기반으로 한 용서가 ‘회복적 사법’이라는 궤변도 이어갔다. 시민들의 외부감시가 부담스러웠던 탓인지 또 다른 피고인 변호인은 방청객들을 가리켜 ‘젠더 갈등을 조장하고 이용하는 자들’이라며 비난했다. 피해자 공격에 이어 피해자 변호사, 시민 방청객 공격이라는 새로운 전략을 펼친 그들에게 맞서 피해자 어머니는 의견진술을 통해 피해자와 가족의 삶이 피고인 범행으로 어떻게 무너졌는지 담담하게 전하려 애썼다.
7월11일엔 ‘거제 교제살인사건’ 1심 두 번째 공판 방청을 위해 경남 통영으로 갔다. 그새 많이 지친 피해자 고 이효정씨 어머니의 손을 잡고 초콜릿을 건네며 무엇을 할지 고민을 이어가다 법정에 들어섰다. 피고인 변호인은 피고인 폭행과 피해자 사망의 인과관계 입증을 위해 필요하다며 사실조회를 신청하겠다고 했고, 재판부는 늘어지는 일정을 경계하며 다음 공판일을 잡았다. 법원을 찾은 이들과 인사하고 서울로 향한 나는 다음날인 7월12일 인천지법으로 향했다. 남편에 의해 성인방송 출연을 강요받으며 착취당하다 자살한 피해자 사건의 1심 선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방청석에서 재판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피해자 아버지를 앞에 두고 판사는 피해자의 자살에 다른 요인이 있을 수 있다는 판단을 토대로 징역 3년(구형 7년)을 선고했다. 인천지법 내 나무를 들이받으며 고통스러워하던 피해자 아버지의 모습이 생생하다.
7월17일 서울고법에서 진행된 ‘인천 스토킹 보복살인사건’의 2심 선고도 지켜봤다. 부모와 어린 딸의 생계를 책임지던 피해자의 삶을 조명하는 재판부의 말에 이어 1심보다 5년이 올라간 징역 30년이 선고됐다. 여러 감정이 교차했을 피해자 사촌, 지인들은 선고 뒤 이어진 기자회견에 참석해 다른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제도적 보완, 시스템 변화를 촉구했다. 아직 피해자를 떠나보내지 못한 것 같다며 허망함을 토로하던, 그럼에도 할 수 있는 일이 더 있을지 고민하던 피해자 사촌언니의 눈물이 여전히 마음에 남는다.
7월22일 국회에서 열린 ‘형사소송 절차상 성폭력 피해자 권리보장을 위한 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여해 시민, 피해생존자, 연대자 입장에서 ‘피해자는 당사자’라는,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현실을 알리고 변화를 촉구했다. 귀가 뒤 최근 4년간 있었던 교제폭력, 교제살인사건 판결문 분석 등을 하며 남은 7월 일정을 확인했다. 7월23일로 예정됐던 ‘바리캉 교제폭력 사건’ 2심 선고는 피고인 쪽이 또 기습공탁을 하면서 30일로 미뤄졌다. 7월24일에는 서울고법에서 열리는 현아무개씨의 아내 살해 사건 2심 재판 방청을 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다른 사건 피해자와 함께 광주지법에 갈 계획이다. 25일엔 경기 수원에서 ‘김레아 교제살인사건’ 1심을, 26일엔 서울중앙지법에서 ‘의대생 최아무개 교제살인사건’ 첫 재판을 지켜볼 예정이다. 그리고 30일 ‘바리캉 교제폭력사건’의 2심 결과를 확인할 거다.
7월은 유독 살해당했거나 죽음으로 몰려간 여성의 사건이 많았다. 아니, 늘 많았는데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만. 본업을 하면서 틈날 때마다 이렇게 전국 법원에 다니는 이유는 피해자와 가족, 지인 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는 확신을 주고 싶어서다. 냉혹한 법정에서 그들을 외딴섬으로 고립시킬 수 없어서다. 방청석에서 감시자, 목격자, 기록자로서 사법시스템 현실을 파악하고 문제를 확인하며 대안을 마련하는 역할도 하면서 말이다. 피해자가 살아 돌아올 수 없고 피해 이전으로 돌아가긴 어렵다고 해도, 그들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 사회와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 나는 오늘도 눈과 귀로 현장을 담는다.
마녀 D 반성폭력 활동가·<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저자
*마녀 D는 성폭력 재판이 열리는 전국 법원을 찾아가 지켜보고 기록하고 공유합니다. 3주마다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