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무서움을 아셔야…” 화석연료 포기한 덴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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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방지의 새벽을 달리다]‘공공선’ 위한 복지와 기후위기 정책… 화석연료 포기한 덴마크
‘동해 스카이 레이스’는 화마가 지나간 강원도 동해시 묵호 밥봉과 옥계 망운산을 달린다. 임도가 드러난 길을 러너들이 달리고 있다. 신동호 제공


그늘이 달아난 땅을 달린다. 해는 종일 민망하다. 자갈이 나무들의 비명을 움켜쥐고 있다. 자갈이 발에 차일 때마다 비명이 다리를 따라 귓전까지, 째질 듯 온다. 나무들의 머리는 하늘에 닿을 듯 붉게 치솟아 사라졌다. 까맣고 앙상하게 타고 있는 아랫도리를 볼 겨를이 없었다. 작은 풀들은 운다. 돌들은 벌거벗고 있다. 슬픔이 아직 땅에 숨어 있는 까닭이다. 러너들이 뜨거운 공기를 자른다. 여름이 땀방울을 붙잡고 미끄덩, 땅에 떨어진다. 나는 자연의 고통을 보고, 자연은 나의 고통을 본다.

불탄 자리에, 불탄 세월을 마주하고


밥봉과 망운산을 달린다. 강원도 동해시 묵호와 강릉시 옥계의 봉우리들이다. 두 해 전 밤, 갑작스레 불이 황혼을 집어삼켰다. 바다가 발을 동동 굴렀지만, 바다의 발은 소용돌이처럼 맴돌았다. 물보라가 바람의 등에 올라타 검은 연기 사이로 산에 올랐다. 절망과 폐허를 이상하게 사람들은 산불이라 부른다. 산불이 짠 바닷물을 마셨다. 비는 오지 않고, 갈증만 심해졌다. 건조해진 높새바람 탓이라고도 하고, 송진 탓이라고도 한다. 불행히도 늙은 소나무들이 대형산불의 누명을 쓴다. 지난 산불은 인재였다. 더러 이웃들은 홧김에 불을 놓는다.

망상 해수욕장의 모래사장을 달린다. 한 해 전, 젊은 러너 부부가 ‘동해 스카이레이스’라는 대회를 개최했다. 근사한 이름 뒤에는 자연을 좀더 깊이 알아보자는 취지가 담겨 있다. 초반 2㎞, 모래사장에서 근육의 힘을 풍화시킨 러너들은 이내 헐벗은 언덕배기, 내리막길과 맞닥트린다. “자연의 무서움을 아셔야…”, 사회자인 남편 러너가 출발 전에 말한다. 러너들은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자연이 언제든 앙상하게 바뀔 수 있음을 경험한다. 나는 소문으로만 듣고, 2회 대회를 단단히 별러왔다. 나의 힘겨운 모습으로 나무들의 화가 좀 풀리길 바라왔다. 덕분에 불탄 자리에, 불탄 세월에 새살이 돋는 경험을 한다.

여름에 죽은 친구들은 뙤약볕보다 뜨겁다. 바람이 칠성판 위에 눕고, 불꽃들이 물고문을 받던 시절이다. 자기 몸에 불을 지른 사람은 눈물이 많다. 눈물이 불을 만나 날카로운 유리칼이 된다. 칼날이 시대를 벤다. 저녁마다 부서진 유리를 쓸었다. 쓰레기가 되기 싫은 유리는 눈물로 되돌아가 바닥에 스민다. 하루하루 이별이 쌓여 오늘이 됐다는 걸 안다. 불탄 자리를 달리며 불탄 친구들 이름을 부른다. 친구들은 간혹 먹구름으로 돌아와 비를 내렸지만, 자주 잊혔다.

‘동해 스카이 레이스’를 달렸다. 자연을 달리기 위해 자연을 생각해야 했다. 굿러너컴퍼니 제공


달리다보면 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래는 푸른색으로 부서진다. 스무 살의 내가 망상 해수욕장의 수상안전요원으로 사람을 구하고 바닷물을 툭툭, 털어내던 모래다. 그 여름 뒤로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았다. 국가가 국민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걸 알게 됐고, 그런 국가에 저항하는 것이 살아남은 자의 의무라 여겼다. 자신을 위한 일은 후순위가 됐다. 내 몸을 가꾸는 운동은, 〈공공의 적〉 연쇄살인범 조규환 같은 악당들이나 하는 사치라 여겼다. 정신과 육체 사이에 가시나무를 심었다. 미련하다. 육체가 지치면 마음까지 지친다는 걸 알 수 없었다. 문장이 병들면 아무도 내 글을 읽어주지 않는다는 걸 몰랐다. 자꾸 길을 잃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 마음먹은 건, 이미 마음이 까맣게 부서져 다시 일어나기 힘든 시기였다. 처음엔 산에 올라 혼자 있었고, 나중엔 지상에 내려와 혼자 달렸다. 어설픔이 슬금슬금 사라지면 반바지가 짧아진다. 숨이 목까지 차오르면 세상에 조금 너그러워진다. 지친 몸으로 앉아 있다보면 다시 용기가 솟는다. 몸이 이룬 작은 결과가 정신을 조금씩 잡아당긴다. 깨어난 몸이 정신을 깨운다. 깨어난 정신이 기억을 깨운다. 변화한 것과 변화하지 않은 것 사이를 구별해내는 것은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아는 것과 같다. 달리기가 어느 정도 그 길을 보여줬다. 재생하는 기분이었다.

달리기가 슬픔을 징검다리 삼아 강물을 건넌다. 묵호와 옥계에는 일상이 있었고, 방화가 있었고, 소방관이 있었고, 러너들이 있다. 공감이 이어져 좋은 대회를 만들고, 좋은 대회에 참가하고, 좋은 대회를 이야기한다. 언제나 변화해야 할 것은 자신의 늑골 어디쯤 보름달처럼 떠 있다. 달리면서 환하게 빛난다. 여름에 죽은 친구들 이상으로 젊은 러너들은 의미 있게 산다. 아무렇지 않게 무거운 걸 담아간다.

묵호 밥봉의 불탄 소나무 밑동, 굽은 등이 세월을 말해준다. 신동호 제공


특별한 승자 만들기보다 패배자가 없도록


덴마크의 바람은 북해에서 온다. 코펜하겐의 10월엔 바람이 골목에서 서성이며 행인을 노린다. 얇은 운동복을 입은 새벽, 내가 걸려든다. 쓱쓱, 빙하랑 어울려 작당했던 바람이 운동복을 찢는다. 귓불이 몇 번 떨어져 몇 번 줍는다. 도시가 부르르 떤다. 어깨를 펴본다. 속도를 올려본다. 추위는 얼음을 너무 많이 먹었다. 추위를 업은 바람이 쫓아오다 말고 중력에 굴복한다. 불 꺼진 진열장의 빵들이 부풀어 오른다. 문틈으로 비집고 나오려 한다. 부두 옆 창고의 철문이 덜커덩거린다. 바닷가엔 육지가 궁금한, 작은 인어공주가 앉아 있다. 키 큰 안데르센이 바다 위를 굽어보고 있다. 사랑을 잃고, 사랑을 잃은 사람들을 위로한다. 바다 안에서 목소리를 잃어버린 낮이 바다를 따뜻하게 데우고 있다.

덴마크는 나폴레옹 편을 든다. 스웨덴은 영국 편이다.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잃는다. 제1차 세계대전, 덴마크는 중립이다. 복지의 첫발을 내딛는다. 1940년, 나치가 덴마크를 침공한다. 1943년, 완전 손아귀에 쥔다. 소련의 공격을 받고 아이슬란드를 잃는다. 덴마크 전성시대였던 1397년, 마르그레테 1세 여왕이 주도했던 칼마르 동맹(덴마크·스웨덴·노르웨이 3국 연합)의 힘은 북구 신화의 한 소품이 된다.

그러나 그건 평민들의 일은 아니야, 덴마크 목사 니콜라이 그룬트비가 말한다. 그건 왕가의 일이다. 승리하고 승승장구했던 것도, 패배해 나락에 빠진 것도 귀족이다. 국민은 별일 없이 다시 달린다. 잃어버린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 참된 덴마크인은 신으로부터 받은 녹색의 땅을 보살피고 기뻐하는 사람들의 친구다, 이번엔 시인 니콜라이 그룬트비가 말한다. 농민이 자존심을 찾고, 평민이 복지의 덴마크를 선택한다. 잃어버린 것을 그들이 안에서 찾는다.

숙소에서 인어공주 동상까지 달린 덴마크 코펜하겐의 지도. 신동호 제공


어디든 기득권자가 평민의 권리를 손에 쥐고 있다. 자신이 세상을 바꿀 적임자라 주장하는 자들은 이 순간에도 평민들에게 권리를 양도하라 한다. 덴마크는 그런 자들의 욕망을 물리친다. 우리는 경쟁하지 않는다, 덴마크가 말한다. 우리는 당신을 벌써부터 좋아하고 있다, 코펜하겐이 말한다. 잘난 체 마라, 가르칠 필요 없다, 너나 나나 똑같다, 스칸디나비아가 말한다. 친구가 친구를, 이웃이 이웃을 믿는다. 친구를 위해 복지가, 이웃을 위해 기후환경 위기가, 남의 일이 아니다. 경쟁으로 우열을 매기던 문화에서 상호작용으로 장점을 발휘하는 문화로 재생한다. 결승점 통과가 중요하다. 먼저 온 이들이 더 오래 박수를 친다. 특별한 승자보다 한 명의 패배자도 나오지 않도록.

화석연료를 쓰지 않겠다, 덴마크는 결심한다. 덴마크에서는 바람이 잔업, 철야다. 프로펠러를 돌리다가 과로사할 지경이다. 국민 40%의 자전거는 매일 바쁘다. 직업이 장관이거나 국회의원인 이들이 자기 편하자고 자전거 도로를 너무 넓게 만들었다. 2050년에는 태양과 바람만 남기겠다는 결심, 덴마크에는 모여서 자기들 힘으로 바람개비를 설치하려고 생긴 마을이 많다. 바람의 마을에 가려면, 선한 마음의 언덕을 넘어야 한다. 신뢰하는 마음의 냇물을 건너야 한다.

2018년, 코펜하겐 P4G(녹색성장과 글로벌 목표 2030을 위한 연대) 정상회의에서 한국 대통령이 연설한다. “얼굴도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희생한 인류애가 기적 같은 일을 만들어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덴마크 병원선 유틀란디아호가 999일 동안 머물며 5천 명의 군인, 6천 명의 민간인을 치료했다. 덴마크 농부의 딸, 젊은 손이, 한국 농부의 아들, 긴 한숨을 어루만졌다. 우리 역시 평범함이 위대해지고 있다. 이웃의 선한 일엔 배 아파 하지 않는다. 냅다 뜀박질만 하는 게 아니다. 불탄 자리, 마음을 본다. 세계가 우리를 도왔듯 평범한 우리가 인류애를 갖고 평범한 우리 스스로를, 또 세계를 도울 것이다. 연설은 이렇게 마친다. “인류가 사랑하는 안데르센의 동화는 이런 문장으로 끝납니다. 그래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인어공주가 되찾은 목소리엔 낮의 목소리도 들어 있다.

결승점에 도착한 러너 모두 주인공


묵호에서는 낡음이 흉이 되지 않는다. 짙은 화장으로 애써 감추지 않는다. 러너들의 저녁에는 흥청망청이 외롭다. 땀이 그곳 땅과 사람 사이에 이야기를 전한다. 옥계에서는 불행이 거름이 된다. 젊은 소나무가 튼튼하게 자랄 것이다. 군수가, 높은 나리가 한 번 오는 것보다 새벽부터 서두른, 젊은 러너 한 명의 설렘이 낫다. 그들은 애인과 혹은 아이들과 한적한 바다, 불탄 산으로 간다. 평범한 사람들끼리의 시끌벅적, 한 밥상이다.

아빠, 달리러 왔어요, 아이가 말한다. 달리러 여기까지 와요, 민박집 젊은 여주인이 묻는다. 많이 왔어요, 아빠가 말한다. 내년에도 또 와요, 슈퍼마켓 중년의 아저씨가 카드를 건네주며 묻는다. 잠 속으로 달리는 출발신호를 기다리는 사이 갑작스레 아침이 온다. 태양이 모든 러너에게 매달려 수백 개가 된다. 결승점에 도착한 러너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사회자인 남편 러너가 일일이 불러준다. 달리는 이들 모두 주인공이다. 멀리 그늘이 수줍은 모습으로 산에 다가가고 있다.

덴마크 코펜하겐의 10월 새벽, 북해의 바람을 견디며 달려 도착한 인어공주 동상. 신동호 제공


신동호 시인·전 대통령 연설비서관

*연재 소개: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58번의 순방으로 40개 나라를 방문했다. 신동호 시인은 연설비서관으로 참모 가운데 유일하게 모든 순방 일정을 보좌했고, 새벽 시간을 활용해 낯선 나라를 달렸다. 그때 보고 느낀 감정은 문 전 대통령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떠나며’ 시리즈에 고스란히 담기기도 했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시인의 달리기에 대한 생각과 함께 묵혀놓았던 순방지의 새벽 이야기들을 4주마다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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