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일선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정서는 무력감과 냉소다. 그 일선이 교실이건, 응급실이건, 동사무소건, 소방현장이건, 주차 단속이건 어디건 그렇다. 일선에 있는 사람들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벌어지는 모든 잘못에 대한 원성과 원망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욕받이’가 됐으며 더 이상 참지 않는 ‘소비자’들이 휘두르는 폭력 위험에 그대로 노출돼 있다.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조금이라도 더 의욕적으로 나서다가는 시스템의 허점에 따른 위험을 고스란히 덮어써야 한다. 가장 많이 만나는 ‘일선’인 교실에서 소란을 피우며 다른 학생들의 학업을 방해하는 학생을 제지하다가 봉변을 당한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의욕적으로 실험 위주의 수업을 진행하다 자칫 작은 사고라도 나면 항의 정도가 아니라 고발당할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니 일선에 선 사람들은 방어적이지 않을 수 없다. 시스템이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음을 절실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아무리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라고 말하더라도 신뢰하지 않는다. 그 ‘위’가 언제 바뀔지 모르기 때문이다. ‘위’가 바뀔 때마다 정책도 바뀌고 정책이 바뀜에 따라 책임도 바뀐다. 대중뿐만 아니라 일선에 서 있는 사람이 시스템에 대해 가진 확고부동한 ‘믿음’은 ‘불신’이다.
방어적으로 움직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규정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규정을 따르는 게 무엇이 문제냐고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규정은 늘 ‘해석’을 필요로 하며 해석 때문에 움직일 여지, 즉 자유가 생긴다. 규정이 행위자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 아니라 규정이 행위자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규정에 따르는 것이 단순 반복이기만 한 건 아니라는 말이다. 이 자유에 의해 행위자는 생각하고, 선택하고, 결정한다. 그 결정으로 생각하지도 못한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러면 이런 해석을 한 사람은 주인공이 되고 새로운 드라마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라면 법칙을 따르되 그 법칙을 활용해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을 자유라고 불렀을 것이다. 역시 프랑스 철학자인 브뤼노 라투르의 개념을 따른다면 규정에 어긋나지 않지만 그것을 해석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일이 ‘변형적 반복’으로서의 매개 행위일 것이다. 일선은 규정을 단순 중개하지 않고 매개하는 곳이다. 그럴 때 그곳은 행위자들의 번역 행위라는 활동이 일어나는 박진감 넘치는 현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매개 행위가, 즉 활동이 시스템에 의한 책임 전가라는 위험에 노출된다면 아무도 매개하지 않으려고 한다. 규정을 가장 좁게 해석해 단순 중재하며 자신을 방어하려고 할 것이다. 물론 이 단순 중재도 해석이다. 규정을 그렇게 해석해야 자신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일선은 그 누가 오더라도 “안 됩니다”라는 말만 하면서 규정을 무한 반복 재생하는 역할만 하려고 한다. 지금 많은 사람이 일선에서 듣는 그 반복되는 말들 말이다.
물론 그 결과 일선이 안전해진 것이 아니다. 일선이 소극적으로 될수록 책임 전가는 피할 수 있지만 무력한 공공성에 대해 시스템 밖으로부터의 원망과 폭력이 기다린다. 민원을 담당하는 일선 창구는 날마다 폭력에 노출돼 있으며 심할 경우 생명의 위협도 느낀다. 일선이 시민과 충돌하는 현장이 돼버린다. 그에 대한 통치 권력의 대책이라고는 보디캠(Body Cam, 몸에 부착하는 감시 카메라)을 제공하고 민원 창구마다 경고문을 부착하는 것이 전부다. 이렇게 되면 일선은 시민과 통치 권력 모두에 냉소적이 된다.
사태가 이렇게 된 데는 여러 요인이 있다. 무엇보다 시스템이 일선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무책임함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정치도 마비됐지만 동시에 놀랄 정도로 통치도 내팽개쳐져 있다. 오로지 정치의 가장 좁고 치사한 형태로서의 ‘치안’ 행위만 있을 뿐이다.
통치가 방치돼 있다는 것은 시스템의 허점이 드러났을 때 알 수 있다. 어떤 시스템이건 허점이 있고 이 허점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행위자가 있다. 시스템은 이 허점을 파고드는 행위, 즉 ‘해킹’에 민감해야 한다. 현실 세계에서의 시스템 해킹은 처음에는 약삭빠른 몇 명만 이용하지만, 초연결 정보사회의 특성상 빠른 속도로 다른 행위자에게 퍼지는 해킹의 대중화가 일어나고 시스템은 허수아비가 된다.
창비에서 나온 ‘수능 해킹’은 교육현장과 수능이라는 평가방식을 통해 이 점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예리하게 보여준다. 이 책의 저자들은 한국의 수능이 단순 지식암기형이라는 일반적인 비판은 낡은 비판이라고 단언한다. 학력고사와 비교해 상당한 수준의 분석력과 사고력을 요구하는 시험으로 진화했다. 물론 그렇다고 학생들의 사고력이 수능을 대비하며 비약적으로 상승한 것도 아니다. 저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수능은 지식암기형 시험이 아니지만, 사고력을 평가하는 시험도 아니다. 해킹당한 시험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수능을 사교육에 의해 해킹당했다고 말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수능이 안정화돼 성숙기에 접어들면서 문제 유형이 표준화돼 전형성과 예측가능성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일종의 ‘역공학’ 기법으로 출제 원리를 추론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사교육이 한 해킹이 바로 이렇다는 지적이다. 거창한 비밀 브로커나 뒷거래가 필요한 게 아니라 패턴 파악에 재능 있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기출문제의 패턴을 파악해 그것을 반복해서 훈련시키면 된다.
시스템이 이런 해킹에 대처할 의지가 있다면 수능 경향 고착화를 피해야 한다. 그러나 저자들은 해킹을 피하려는 이런 시도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입장에서 보면 ‘이득 없는 모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쉬워지건 어려워지건 난이도 조절에 실패하면 바로 사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난이도 조절에 목숨이 걸린 시스템의 ‘보신’을 위해서라도 수능의 출제 경향은 고착화될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해킹 가능성과 동의어’다. 저자들이 통치가 사교육과 적대적 공생관계에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다.(이 글에서 ‘수능 해킹’에 대한 부분은 최대한 책의 원문을 그대로 따왔기에 따옴표가 남발할 듯해 생략한다.)
이 책의 통찰은 교육현장과 수능에만 국한될 이유가 없다. 오히려 한국 사회 전체의 핵심을 뚫는 이야기로 충분히 확장할 수 있다. 특히 해킹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지금 일선이 왜 무력하고 냉소적인지 명료하게 알 수 있다. 통치가 해킹에 대해 대처할 생각이 없다. 저자들의 주장처럼 해킹을 방지하려고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이득 없는 모험’이기 때문이다.
공공성의 일선이 무력화된 상징적인 사건들이 있다. 연일 보도되는 ‘주차 빌런’ 사건들이 대표적이다. 그중 가장 상징적인 것이 경기 고양시 일산에서 황색실선이 있는 갓길에 3년이 넘도록 교차로 모퉁이 5m 넘는 곳에 교묘히 주차해 견인할 수 없게 한 경우다. 구청 직원이 그를 만나보기까지 했지만 ‘법잘알’이라 소용없었다고 말한다. 전국의 경치 좋은 곳에는 알박기 텐트가 넘쳐나도 손대지 못한다. 가뜩이나 비좁은 울릉도 갓길에는 캠핑카가 줄줄이 주차해 도로도 북새통이지만 규정상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이젠 너도나도 해버려서 통제 불가 수준이 된다.
통치란 이렇게 해킹이 대중화되는 것을 초기에 막는 것이다. 이를 막으려면 일선에서 일어나는 온갖 해킹을 빨리 업데이트하고 시스템의 허점을 보수하며 일선이 대처할 수 있도록 규정 해석에 새로운 신호를 주거나, 해석으로는 부족할 경우 새로운 규정을 일선에 불어넣어야 한다. 그 어느 때보다 일선과 ‘상부’ 사이 긴밀한 의사소통과 숙의가 필요하다. 이것을 통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통치 권력은 해킹을 방치하고 있다. 아니, 방치를 넘어 ‘수능 해킹’에서 보여주는 사례처럼 해킹에 의존한다. 일선을 시스템 안에서 규정을 해석해 새로운 형식/양식을 만들어 시스템에 생명을 불어넣는 주인공으로 키우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바깥에서 규정을 해킹해 시스템을 좀비로 만드는 것을 공인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니 시스템 안에 있는 일선은 무력감과 냉소가, 시스템을 해킹하는 바깥은 활력이 넘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빌런이 주인공이 된다. 주인공이란 선택을 통해 자유를 실천하고 실현해 드라마를 흥미진진하게 전개하는 화신이어야 하는데 여기서는 빌런만이 그런 존재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 정의의 실현이 혹 가능하다면 사적 제재를 가하는 존재의 출현이다. 문제는 정의의 실현과는 상관없이 개인적 분노를 일선에 퍼붓는 일이 일상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공공성의 붕괴에 분노한 시민들은 ‘무력한’ 일선을 향해 폭력을 행사한다. 응급실을 지키던 전문의들은 완전히 번아웃이 돼 떨어져 나가고 있는데 시민들의 고성과 폭력은 바로 이 전문의들을 향한다. 전문의들은 내가 왜 이 일선에 있어야 하는지 냉소하며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아직 최악의 주인공은 등장하지 않았다. 이 무력하고 무책임한 통치 뒤에는 반드시 ‘사악한’ 통치가 등장한다. 단기적으로는 통치가 실종되고 무력해 보이기에 시민들의 불만과 원성이 쌓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이 아수라장과 무질서를 강력하게 종식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진다. 이것은 무책임한 통치에 필연적으로 통치가 아닌 전쟁을 수행할 더 많은 비상 권력을 부여한다. 통치가 무력할수록 치안은 더 강력해질 수 있는 요술을 부리는 셈이다. 이 파국이 저지 없이 더 진행된다면 자유의 종말을 의미하는 최악이 도래할 것이다. 지금 이 사악한 통치가 무책임한 통치 앞에서 입을 떡 벌리고 기다리고 있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