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1100억원대 예산을 들여 만든 종로 세운상가의 공중보행로가 철거 수순에 들어간다. 이용률이 저조하고 사업 목적에 맞지 않다는 판단에서다. 이를 비롯해 오세훈 시장은 취임 이후 줄곧 전임 시장의 역점사업을 중단시키거나 철회하고 있어 '박원순 지우기'라고 보는 시각이 짙다. 시의 행정 방향은 지자체장의 결정 사항이지만, 천문학적 시비가 투입된 사업을 또 돈을 써서 되돌리는 게 합리적이냐는 비판도 있다.
개통 2년여 만에 또 사라지는 '박원순표' 사업
서울시는 세운상가 공중보행로 철거 방안에 대해 이달 중 주민 공청회를 연다고 1일 밝혔다. 서울시는 주민 의견을 수렴해 내년부터 철거 공사에 들어갈 예정이다. 이 공중보행로는 세운상가와 종묘, 청계·대림·인현·진양상가 등 7개 건물을 잇는 길이 1㎞의 다리다. 박원순 전 시장 임기 때인 2016년 건설이 추진됐다. 전 구간이 개통된 건 오세훈 시장의 4선 임기가 시작된 2022년 7월이다.
세운상가 공중보행로는 오 시장과 박 전 시장의 시정 철학이 충돌한 대표적 사업으로 꼽힌다. 도시 개발을 중시하는 오 시장은 2006년 첫 번째 임기를 시작하자마자 세운상가 일대를 재정비 촉진 지구로 지정했다. 이후 일대를 통합 개발하기 위해 재정비 촉진 계획을 수립했다. 하지만 도시 재생을 내걸고 2014년 취임한 박 전 시장은 일대 보존을 목표로 재정비 촉진 계획을 변경했다. 이에 따라 세운상가의 접근성을 높이고 상권을 활성화하고자 공중보행를 설치했다.
하지만 목적과 달리 공중보행로를 찾는 사람은 적은 것으로 조사됐다. 서울시가 2022년 10월부터 1년 간 보행량을 조사한 결과, 총 보행량이 1만1731건으로 나타났다. 당초 예측치인 10만5440건의 11% 수준이다. 또 감사원은 지난 8월 공중보행로에 대해 "세운상가와 주변 지역 재생에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서울시에 주의를 줬다. 이 같은 감사 결과는 이번 공중보행로 철거 결정에 근거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도시재생에 분노한 오세훈…"개발 막는 대못" "피를 토할 심정"
공중보행로는 처음부터 오 시장의 미움을 샀다. 그는 2022년 10월 국회 국정감사에서 공중보행로에 대해 "개발을 저해하는 대못"이라고 표현했다. 앞서 2021년 11월에는 시의회에서 "세운상가에 올라가 분노의 눈물을 흘렸다"며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세운상가 개발을 막은 박 전 시장의 도시재생 사업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결국 공중보행로 철거는 정해진 수순이었다는 분석이 뒤따른다.
이 밖에도 오 시장 취임 후 서울시는 박 전 시장의 여러 역점사업에 제동을 걸었다. 박 전 시장이 2014년부터 536억원을 들여 추진해 왔던 베란다형 태양광 보급 사업은 2022년 맥이 끊겼다. 박 전 시장이 2015년 서울시 슬로건으로 내세운 '아이·서울·유(I·SEOUL·YOU)'도 공식 폐기했다. 해당 슬로건을 개발하는 데 들어간 돈은 8억원이다. 여기에 관련 행사 주최비와 조형물 설치비, 홍보비 등을 합하면 소요 예산은 100억원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또 뉴욕의 브루클린 브릿지를 표방하며 2019년 추진된 100억원 규모의 '백년다리(한강대교 공중보행교)' 조성 사업도 중단됐다. 여기에는 이미 16억원 가량이 투입됐다. 이번에 철거가 결정된 세운상가 공중보행로 건설 사업에는 1109억원이 들어갔다.
이처럼 적게는 수십~수백억원에서 많게는 1000억원 넘게 쓰인 사업을 백지화하는 행정을 두고 예산 낭비라는 질타가 제기된다. 허훈 서울시의원(국민의힘)은 8월 시의회에서 "서울시의 수장이 바뀌며 개발과 재생 사이에서 몇 차례 사업 추진과 중단이 반복됨에 따라 애꿎은 서울시민의 혈세만 공중분해 됐다"고 꼬집었다.
"개발·재생 사이에서 혈세만 공중분해 됐다"
사업 중단에 따른 예산의 추가 투입도 불가피한 상황이다. 당장 오 시장이 서울시의 신규 슬로건으로 내세운 '서울, 마이 소울(Seoul, my soul)'을 개발하는 데에만 3억원이 따로 들어갔다. 향후 홍보비와 기존 슬로건의 교체 비용을 고려하면 금액은 계속 불어날 예정이다.
1km짜리 세운상가 공중보행로를 철거하는 데 들어갈 돈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부산 사상구와 남구를 잇는 동서고가로의 7km 구간 철거비는 2016년 기준 약 1000억원으로 추산됐다. 1km당 142억원 꼴이다. 2019년 철거된 부산의 1km 규모의 자성고가교는 해체하는 데 93억원이 들어갔다. 물론 차량이 다니는 고가도로와 공중보행로를 단순 비교하긴 힘들다. 다만 보행로 철거비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고양시가 일산 킨텍스 인근에 설치한 원형육교(높빛구름다리)의 경우, 건설비가 37억원인데 철거비는 그 43%인 16억원으로 추산됐다.
이러한 가운데 오 시장은 박 전 시장의 대표적 도시재생 사업인 '서울로 7017(서울역 공중공원)'에 대해서도 부정적 입장을 내비쳤다. 서울시는 지난 6월 서울역 일대 활용 방안에 관한 아이디어 공모전을 개최한 바 있다. 시 관계자는 "이번 공모전은 서울로 7017의 철거 여부와 관련 없다"고 밝혔지만, 무용론을 강화하는 밑그림으로 쓰일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오 시장은 '박원순 지우기'란 시각에 선을 그었다. 그는 2021년 11월 시의회에서 백년다리 조성 사업 중단과 관련해 "(사업의 존재를) 몰랐는데 첫 보고를 받고 부정적 느낌을 받았다"며 "'전임 시장 지우기'라는 오해를 많이 받는데 '오세훈이 싫어서 브레이크를 건다'고 하는 건 억울하다"고 했다. 시 관계자는 이번 세운상가 공중보행로 철거 방침에 관해 "감사원의 지적에 따라 적법하게 결정한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