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플랫폼 발란 모델로 활동했던 배우 김혜수/ 한경DB
명품 플랫폼 발란 모델로 활동했던 배우 김혜수/ 한경DB
데이비드 베컴의 부인이자 유명 걸그룹 스파이스 걸스 멤버 출신인 빅토리아 베컴은 최근 영국의 명품 플랫폼 ‘매치스패션’에 자신의 브랜드에서 나온 옷과 가방 등을 되돌려달라고 요청했다. 매치스패션이 파산할 것이란 우려가 나오면서다. 빅토리아 베컴은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 제품을 매치스패션을 통해 판매해 왔다. 빅토리아 베컴은 매치스패션이 문을 닫을 경우 물품 대금을 지급받지 못할 것이라 판단해 재고만이라도 확보하길 원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빅토리아 베컴. 사진=한경DB
빅토리아 베컴. 사진=한경DB
지난달 발표한 매치스패션 법정관리인 보고서에 따르면 이 플랫폼은 500명 이상의 무담보 채권자에게서 약 3600만파운드(약 620억원)의 빚을 지고 있다. 여기에는 버버리 구찌 프라다 생로랑 등 유명 명품 브랜드도 다수 포함됐다. 이들 브랜드가 대금 대부분을 회수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보고서에선 채권자들이 파운드당 1페니(파운드의 100분의 1) 미만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다.

성장세 확 꺾인 명품 플랫폼

한때 명품 시장의 블루칩이었던 매치스패션은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엔데믹 이후 성장세가 완전히 꺾였다. 작년에만 700억원의 손실을 내 영국 프레이저스그룹에 6300만 달러(약 864억원)에 팔렸다. 사모펀드가 2017년 매치스패션을 인수한 금액이 10억달러(약 1조3720억원)였던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땡처리’ 수준이다. 하지만 프레이저스에 인수된 지 3개월도 채 안 된 올해 3월 법정관리절차에 들어갔다.

매치스패션뿐 아니라 상당수 명품 플랫폼들이 존망의 기로에 놓였다. 세계 최대 명품 플랫폼으로 꼽히던 ‘파페치’는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다 상장 폐지 직전 가까스로 쿠팡에 5억 달러(약 6800억원)에 인수됐다. 하지만 인수 후에도 손실을 내며 쿠팡 실적까지 끌어내렸다. 쿠팡의 올 1분기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반토막 났다. 파페치 인수로 인한 이번 분기 영업손실만 1269억원에 달한다. 파페치를 제외하면 쿠팡의 영업익은 30%가량 증가한 것으로 추산된다.
파페치 전경. 사진=로이터
파페치 전경. 사진=로이터
명품 플랫폼 ‘육스’, ‘네타포르테’ 등도 적자 규모가 커지면서 매각을 진행하고 있다.

국내 명품 플랫폼도 비슷한 상황이다. ‘머트잇(머스트잇·트렌비·발란)’은 매출이 급감하며 영업손실을 내는 상황이다. 지난해 머스트잇·트렌비·발란은 각각 79억원, 32억원, 100억원의 손실을 봤다. 업계 4위로 꼽히던 캐치패션은 경영난으로 지난달 영업을 종료했다. 팬데믹 시기에 비대면 쇼핑으로 인기를 끌었으나 엔데믹으로 명품 소비 트렌드가 변하고 오프라인 구매가 늘면서 매출 타격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명품 플랫폼 살아날 수 있을까

명품 플랫폼 업체들은 광고선전비를 대폭 줄이고 인건비 감축, 사옥 매각 등으로 재무 건전성 확보에 힘 쏟고 있지만 환경은 녹록치 않다. 업계에선 명품 플랫폼사들 규모가 커지면서 대중화에 초점을 맞추면서 갖는 콘텐츠의 다양성 부족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지적한다.

한 럭셔리 브랜드 관계자는 “과거 파페치나 매치스패션 등이 인기를 끈 가장 큰 요인은 큐레이션 역량에 있었다”며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를 먼저 선보여 '다른 곳에선 찾기 어려운 아이템이 이들 플랫폼에는 있다'는 인식이 늘 새로운 유행을 찾는 패션족을 열광케 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플랫폼 규모가 확대되고 대중의 요구가 커지면서 결국 유명 브랜드 입점으로 경쟁력을 확보하는 상황이 되는데, 콧대 높은 명품 브랜드 선택을 받으려면 출혈 경쟁을 하는 수밖에 없다”면서 “그 과정에서 재정은 바닥나고 큐레이션 기능은 희미해져 개성과 차별성을 잃는다”고 짚었다.
왼쪽부터 주지훈·김혜수. 사진=한경DB
왼쪽부터 주지훈·김혜수. 사진=한경DB
국내 명품 플랫폼사들이 인지도를 높이고 몸집을 키우기 위해 주지훈(머스트잇), 김희애·김우빈(트렌비), 김혜수(발란) 등의 톱모델을 기용하면서 수백억원의 비용을 감내한 것도 이 같은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문제는 명품 플랫폼들이 출혈경쟁의 성과를 내기도 전에 경기 침체가 오면서 고가품 소비 자체가 타격을 받은 것. 코로나19 종식으로 해외여행이 재개되면서 명품 소비를 할 수 있는 채널도 다양해졌다. 매장 직접 구매, 면세점 소비가 늘면서 소비 여력이 분산돼 온라인 명품 수요가 확 꺾이고 만 게 치명타가 됐다.

직접 온라인 사업하는 명품 브랜드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그 사이에 명품 브랜드들이 직접 온라인 사업에 뛰어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코로나19 이후 온라인 시장의 가능성을 본 명품업체들은 잇따라 자사몰을 열었다. 한국시장에서만 온라인 자사몰을 운영하는 브랜드는 명품 3대장으로 불리는 ‘에루샤(에르메스·루이비통·샤넬)’를 비롯해 구찌 디올 불가리 까르띠에 멀버리 발렌티노 보테가베네타 등 수십개에 달한다. 명품 브랜드의 자사몰의 경우 가품 위험이 없고 품질 면에서도 신뢰를 확보했다.

종종 온라인 자사몰을 통해 명품을 구입하는 박재은 씨(37)는 “명품은 적게는 수십만원에서 수천만원에 달하는 데 가품 가능성이 단 1%라도 있다면 아무리 사고 싶은 아이템이라도 선뜻 구매하지 않는 편”이라면서 “명품 플랫폼보다는 백화점 공식 온라인 몰을, 그보다는 명품 브랜드 자사몰을 신뢰한다”고 말했다.
사진=한경DB
사진=한경DB
시장조사업체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지난 3월 1020명(만 13~69세)을 대상으로 ‘명품 소비 및 명품 쇼핑 앱(플랫폼) 관련 U&A 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70.5%가 “철저한 검증을 한다고 해도 명품 쇼핑 플랫폼 제품이 가품일 가능성이 여전히 있다”고 답했다. “고가의 명품 제품을 온라인에서 사는 것은 왠지 불안하다”는 답변도 67.9%에 달했다.

소비자 직접 판매(DTC)를 하는 명품 브랜드 자사몰에 비해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기도 쉽지 않다. 명품 플랫폼 업체들은 주로 병행수입 셀러(판매자)가 사이트에 올린 제품을 고객들이 구매하게 하는 ‘직구(해외 직접구매)’ 방식을 취하거나 1차 도매상인 해외 유명 부티크와 계약하고 현지 매장에서 판매하는 제품을 중계 판매하는 ‘직매입’ 구조를 택한다. 자사몰에 비해 유통과정이 최소 2~3단계는 더 있다. 게다가 유명 고가 브랜드일수록 재고 할인·판촉 등으로 이미지가 훼손될까 우려해 플랫폼 의존도를 낮춰 브랜드 라인업을 다양화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대안은 없나

물론 어려운 환경에서도 성장세를 보인 플랫폼사도 있다. 유럽 온라인 명품 쇼핑몰 ‘마이테레사’의 올해 1분기 매출은 전년 동기와 비교해 15%가량 늘었다. 급락했던 주가도 일부 회복세를 보이면서 올해 들어 30% 넘게 올랐다.

마이테레사의 주요 전략은 오프라인 경험을 결합한 VIP 마케팅이다. VIP 기준은 의류와 액세서리에 연간 6만달러(약 8200만원)을 지출하는 고객이다. 마이테레사는 ‘바쁘고 돈 많은’ 고객을 위한 큐레이팅 서비스도 강화했다. 구찌의 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사바토 데 사르노 콜렉션을 독점 공객하는 등 VIP 전용 품목을 확대하는 등의 방식이다. 명품 브랜드와 협업해 디자이너와의 저녁 식사를 주선하고 전용 쇼와 파티를 기획하는 등 오프라인 이벤트를 늘렸다.

오프라인 명품 매장이나 고급 백화점에서 VIP 고객을 대접하는 방식을 온라인 플랫폼에서 차용한 셈이다. 미국 패션 전문지 하퍼스 바자는 “지출이 많은 고객에게 돈으로 살 수 없는 경험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충성도를 키웠다”고 평가했다.
사진=젠테 제공
사진=젠테 제공
국내에선 ‘젠테’가 대다수 업체 매출이 대폭 줄어든 가운데서도 나 홀로 성장했다. 2020년 설립된 후발주자 젠테는 최근 명품족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 매출이 늘었다. 주요 경쟁력은 ‘100% 부티크 소싱’이다. 유통 과정에서 중간 거래상을 생략하고 대형 부티크와 직접 협력해 가격을 낮췄다. 젠테 협력 부티크는 최근 2년여 만에 50개에서 150여 개로 3배가량 늘었다. 국내에 잘 소개되지 않은 신명품을 공략해 신규 고객을 유도하기도 한다.

다만 발란·트렌비 등 선발주자들의 초기 모델 형태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있다. 한 명품업계 관계자는 “발란도 초기 성장기엔 부티크 소싱에 주력하면서 신명품을 새로 소개하는 방식으로 규모를 키웠는데 이와 유사하다”며 “플랫폼이 대중화 단계로 나가면 결국 선두업체들과 비슷한 전철을 밟을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안혜원 한경닷컴 기자 an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