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스파 '아마겟돈' 뮤직비디오 캡처
사진=에스파 '아마겟돈' 뮤직비디오 캡처
"뮤비 공짜로 보기 미안해서 앨범 샀다"
"이건 아이돌 뮤비 수준이 아니라 현대예술 그 자체."
"영상 CG팀 예술 투혼 미쳤네요."
"살다 살다 아이돌 뮤비 보고 소름 돋은 건 처음."
"이 결과물을 만들어낸 스태프들 진짜 레전드."


그룹 에스파(aespa) 신곡 '아마겟돈(Armageddon)'의 뮤직비디오 영상 댓글란은 놀라움과 감탄의 연속이었다. 어둡고 기괴한 오브제들, 뒤틀린 듯한 두 공간, 윈터의 몸에서 돋아나는 날개, 거대한 크리쳐까지 일반적인 걸그룹 뮤직비디오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각종 시각적 요소가 충격을 안겼다. 해외 팬들의 반응까지 폭발적이었다.

K팝 뮤직비디오계 새 레전드를 썼다는 호평을 얻은 이들은 설립 9년 차 리전드필름을 이끌고 있는 장동주, 윤승림 감독이다. 장 감독이 제작 전반을, 윤 감독이 크리에이티브 영역을 맡아 듀오로 활동 중이다. 회사 운영을 비롯해 프로젝트 견적을 내거나 일정을 관리하고, 클라이언트 및 스태프들과 소통하는 업무 등이 제작에 포함된다. 연출·촬영·후반 작업은 크리에이티브 영역에 해당한다. 참고로 장 감독은 제작 일과 더불어 광고 연출도 병행하고 있다.

최근 서울 모처에서 만난 두 사람은 "1년 만에 휴가를 갔다 왔다"며 웃었다. 윤 감독은 "'아마겟돈'에 좋은 반응을 보내주셔서 힘이 되고 감사하지만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하다. 작업하면서 수천 번 본 영상이라서 잘 나온 건지 스스로 가늠이 잘 안되는 상태였기 때문에 얼떨떨하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이에 장 감독은 "난 입장이 달라서인지 '잘 끝났다'라는 생각에 안심이 됐다"며 미소 지었다.
장동주, 윤승림 리전드필름 감독 /사진=유채영 기자
장동주, 윤승림 리전드필름 감독 /사진=유채영 기자
'그간 K팝 신에서 본 적 없는 뮤직비디오'라는 반응은 그 자체로 '아마겟돈'의 색깔을 대변한다. 메탈릭한 질감에 얹힌 글로시한 소재, 그로테스크한 무드 속 아름다움, 차가운 낯섦과 뜨거운 힙함을 오가는 시선까지 혼을 쏙 빼놓는 '3분의 예술'이다.

윤 감독은 "에스파라는 아티스트가 가진 유니크한 콘셉트와 고급스러움에 혁신적이고 진보적인 룩을 시도했다. SM에서도 바랐던 지점"이라면서 "이제는 K팝 뮤직비디오가 단순히 음악을 듣게 하기 위한 홍보 수단을 넘어서 아티스트가 가진 브랜드를 광고해 주고 구축해 주는 매개체가 되지 않았나 싶다"고 생각을 밝혔다.

이미 K팝 팬들 사이에서 리전드필름은 뛰어난 감각과 영상미로 유명한 프로덕션이다. '아마겟돈' 외에도 아이브 '해야', 보이넥스트도어 '어스, 윈드 앤 파이어(Eearth, Wind & Fire)', 피원하모니 '때깔', 있지 '케이크(CAKE)', 나연 '팝!', '세븐틴 '핫(HOT)'·'달링'·'히트(HIT)', 트와이스 '알콜 프리', 트레저 '보이(BOY)', 청하 '스내핑(SNAPPING)', 태민 '원트(WANT)' 등 화려한 포트폴리오를 자랑하는 이들을 향해 "리전드가 리전드 했다"는 칭찬도 나온다.

무엇보다 아티스트의 매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기획된 곡의 콘셉트에 맞게 효과적으로 표현해낸다는 점이 강점으로 꼽힌다. 이들은 '덕질 그 이상'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 감독은 "프로젝트가 들어오면 바로 아티스트에 관해 찾기 시작한다. 프리 기간이 4~8주는 된다"고 밝혔다.

이어 윤 감독은 "팬들이 올린 걸 다 찾아본다. 소구 포인트를 살펴보고, 그 안에서 우리만의 디렉션 포인트를 찾는다. 이 친구가 가진 어떤 매력을 파고들어야 할지, 기존에 안 보여준 건 무엇일지를 탐색해 소속사에 이야기한다"고 전했다. 장 감독은 "조감독들이 다양하게 접근해서 최소 500페이지 정도의 구글 슬라이드가 나온다"고 덧붙였다.
사진=XG 'TGIF' 뮤직비디오 캡처
사진=XG 'TGIF' 뮤직비디오 캡처
'아마겟돈' 뮤직비디오에는 CG에만 무려 15팀이 참여해 화제가 됐다. 사실 K팝 뮤직비디오에 다채로운 CG를 입히고 색다른 룩을 구현해내는 건 윤 감독이 추구해온 지점이었다. 그는 "태민 '원트'로 유명해져서 많은 분이 리전드필름 하면 심오한 걸 떠올릴 테지만 지난해부터 다양한 시도를 했다. 방대한 팀을 섭외해 CG의 문을 열기 시작한 건 XG 'TGIF' 뮤직비디오"라고 말했다.

화사한 색감에 기발한 디자인의 CG가 쉼 없이 이어지는 이 뮤직비디오는 멤버들의 개성은 물론 곡의 통통 튀는 베이스 소스, 후렴구의 퍼커션 사운드와도 사이키델릭한 조화를 이룬다. K팝 뮤직비디오에 '아방가르드'라는 말을 붙일 수 있다면 'TGIF'가 딱이다.

윤 감독은 "한계를 깬 것 같았다"면서 "스스로 지루한 작업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특히 K팝 뮤직비디오는 종합예술의 집결체다. 나 혼자 잘한다고 해서 결과물이 나오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실력 있는 작업자, 실무자분들이 나를 믿고 따라와 줘야 한다. 최근에는 함께해 주시는 스태프분들이 재밌어하는 걸 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그는 "물론 업계에서 리전드필름이랑 하면 진짜 힘들다는 말이 있긴 하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끝나면 항상 보람 있다는 말을 해주신다"면서 "예전과 달리 요즘은 뮤직비디오가 나오면 '감독이 누구냐'며 궁금해하고 찾아봐 주시지 않냐. 그럴수록 더 나태한 작업은 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한다"고 털어놨다.
사진=리전드필름 제공
사진=리전드필름 제공
조감독 시절에 만나 서로의 힘든 시기를 다 지켜봐 온 두 사람은 누구보다 스태프들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윤 감독은 "별거 아닐 수도 있는데 우린 커피를 살 때 꼭 모든 스태프의 것까지 산다. 이게 장 감독의 철학을 보여주는 것 같다"며 웃었다. 장 감독은 "조수 시절에 현장에 가면 윗분들만 커피를 먹지 않냐. 스태프들에게 원하는 걸 다 해주지는 못해도 모두가 커피를 마실 수 있는 환경만은 만들려고 했다. 정말 오랫동안 지켜오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그는 '아마겟돈' 뮤직비디오 촬영 당시를 떠올리며 "경북 영주의 폐관된 리조트에서 찍었다. 야외 촬영이 많았는데 100여명의 스태프 모두 보험 가입을 하는 등 안전에 신경을 많이 썼다. 영주까지 차로 4시간을 가는데 이동시간도 최대한 넉넉하게 잡았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우리가 결제가 제일 빠른 프러덕션이라는 걸 최근에 알았다"면서 "스태프들이 고생한 만큼 그런 걸로 스트레스받지 않았으면 한다. 빠르게 보상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했다.

윤 감독이 강조하는 건 '크레딧 삽입'이다. 일반적으로 뮤직비디오 뒤에는 크레딧이 포함되지 않지만, 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이를 위해서는 저작권자인 각 소속사의 동의가 필요하다. 윤 감독은 "'아마겟돈'에 크레딧이 들어갔는데 스태프들이 감사하다고 말하더라. 별거 아니지만 생각보다 가치 있는 일"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공짜로 보기 미안할 정도"…K팝 뮤비계 '레전드' 쓰는 이들 [김수영의 크레딧&]
회사 설립 당시 1000만원의 저예산 작품으로 입봉해 단숨에 포트폴리오를 넓혀간 이들에게 앞으로의 꿈이 뭐냐고 물었다. 그러자 윤 감독은 "영역을 확장하고 싶다. 이번 에스파도 기술적으로 굉장히 다양한 걸 썼다. 대중들이 반감을 느낄 수 있는 AI 그래픽도 심도 있게 썼다. 뮤직비디오에 국한하지 않고 앨범, 아티스트까지 전체적인 콘셉트도 짜보고 싶다"고 답했다.

후학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L-LAB이라는 이름의 아카데미를 운영한 지 올해로 4년 차가 됐다. 장 감독은 "영상 기획, 제작, 그리고 후반까지 어떤 프로세스로 진행되고 있는지 아카데미를 통해 알려주고 있다. 나와 윤 감독, 그리고 촬영감독까지 셋이 수업을 진행한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사실 하루 쉬거나 다른 작업을 하면서 돈을 더 버는 게 낫다. 아카데미가 수익이 되는 건 아니다"라면서도 "우리도 학생 때 '뮤직비디오 연출 어디서 배우냐' 하는 막연함이 있었다. 그 막연함을 조금이라도 해소해 주고 싶었다. 기초적인 걸 알고 현장에 가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결국 이 역시 리전드필름의 미래이지 않을까"라며 미소 지었다.

K컬처의 화려함 뒤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땀방울이 있습니다. 작은 글씨로 알알이 박힌 크레딧 속 이름들.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스포트라이트 밖의 이야기들. '크레딧&'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을 하는 크레딧 너머의 세상을 연결(&)해 봅니다.

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swimmingk@hankyung.com